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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별장

예촌소나이 2011. 1. 31. 13:57

송당목장내에 있는 민오름을 찾아간다. 민둥산이 오름이라 하여 '민오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이름만을 놓고 보면 별 특징이 없는 오름인 듯 하다. 지금이야 조림을 하여 나무를 많이 심었지만, 옛날에야 대부분의 오름들이

민둥산이었으니.... 도내 '민오름'만 다섯이 된다.

그러나 이 오름이 특별한 것은 오름 밑에 '귀빈사(貴賓舍)'라 불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기 때문이다.

   

 

 

진입로는 빽빽한 삼나무 숲속의 흙길이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편안한 길로 공사를 해 버리는 요즘, 이 길이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울 수가 없다. 이 길을 걷노라면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삼나무 사이로 드는 햇살이 경이롭다

 

 

 

 

 

 

1950년대 당시 제주도민의 상당수는 가축사료인 밀기울로 겨우 연명해가고 있었다. 그마저 밀기울 조차도 가격이 매일 올라서 구하기 어려웠다.

그 즈음 정부는 제주도에 대규모 목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계획은 미8군사령관을 지낸 당시 한미재단고문이었던 밴플리트에 의해 주도되었다.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고 퇴역후 실제로 캘리포니아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어 대통령에게 축산의 발전에 대해 가능성을 설득하곤 했다.

 

밴플리트일행은 제주도 일원을 돌아보고 이곳 송당지역이 대규모 목장지대의 최적지임을 확인하였다. 이곳 송당지역은 조선시대에는 국립마목장인

제1소장이 있던 곳이고, 송당 당신화를 보더라고 목축문화의 기원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1957년 5월 제주도를 방문한 이승만은 관덕정에서 열린 도민환영대회에서 "우리국민도 이제는 쇠고기를 먹어야 합네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자리에서 대통령은 "제주는..."으로 시작해야 할 말을 "하와이.."로 실언을 하기도 했다. 대통령 자신도 실언을 알아채고 "아까는 잘못 말했군.

앞으로 하와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제주도라고 생각해야 합네다."라고 하였다.

 

대통령의 쇠고기 발언으로 국립목장의 건설은 가속도가 붙었다, 육군 공병단에 의해 야간공사까지 하면서 5개월만에 1차완공을 보았고, 

캘리포니아에서 직송되어온 미국산 육우 166두가 성산포항을 거쳐 제주도에 들어왔다. 근대적 제주축산의 시작이었다.

 

 

 

 

 

하루평균 150명 연인원 8000명이 동원돼, 축사 7동, 창고 1동, 특호관사 1동, 을호관사 3동이 완성이 되었고, 자가발전시설과 구내전화가 가설이 되었다.

 

 

 

 

 

 

 

 

 

현재는 '귀빈사'라 불리는 특호관사, 대통령 전용숙소이다. 미국서부의 어느 아담한 단독주택을 옮겨온 것같은 이집은 현무암을 꼼꼼히 다듬어

지은 돌집이다.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테라스의 흔들 의자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목장을 바라보며 커피한모금 마시면

어디 미국 서부의 목장에 와있는 착각이 들지 않을까... 아마 이곳에서 대통령은 오랜세월 보낸 미국에의 향수를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승만 대톨령은 제주국립목장에 지대한 애착을 가졌고, 제주도 방문에서는 여기에서 꼭 묵어 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여기서 묵은 것은

1959년 85세의 때 일이다. 이듬해 4.19혁명으로 하야하게 되니 더이상 여기에 올기회는 없었다.

 

 

 

 

2004년 9월 4일에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 113호로 등록되었다.

제주4.3당시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 제주도민 대량학살의 단초를 제공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 '귀빈사'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기도 했다.

 

내부는 잠겨있었지만, 관계자의 도움으로 잠깐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거의 폐가 수준이었지만. 지금껏 버려진 이유로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볼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벽난로이다. 벽위에 부조되어 있는 소의 두상이 인상적이다. 어느 그리스 신전의 조각상 같기도 하고.

 

 

 

 

당시의 수세식 화장실, 자재는 거의 외국에서 가져왔다.

 

 

 

 

 

 

 

 

침대 가장자리의 격자문양에서 비범함이 느껴진다

 

 

 

 

 

 

 

거실 바닥은 돌로 깔아서신발을 신고 다니는 서양식으로 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송당목장의 제안에서 부터, 건설, 운영에까지

미국인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 졌으니.... 그리고 이미 대통령은 미국에 너무 익숙해 있었다.

 

 

 

 

 

당시의 오븐기구와 냉장고... 아마 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방치를 한 탓에 여기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듯.

 

 

 

 

 

 

 

 

당시의 모일러 시설이다. 한국온돌식 보일러가 아닌 서구식 스팀장치로 난방을 했다.

 

 

 

 

주방공간, 녹슬고 정말 퇴락한 모습이지만, 당시에는 첨단 주방이 아니었을까

 

 

 

 

쌍희(喜喜)자는 두가지의 기쁜일이 동시에 이우러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모든일이 뜻대로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제주조약돌을 모아 계단에 회문장식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염원에도 불구하고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60년 4.19혁명으로 대통령은 하야를 하였고, 그의 일은 후임자의 "당장 집어치워!"라는 한마디에

물거품이 되었다.

 

5.16쿠테타후에 송당목장의 경영부실 실태를 보고받은 박정희 의장은 몸소 목장을 방문해서 실태파악에 나섰다. 창업자라 할 수 있는 밴플리트를 대동하여

제주도를 방문하였고, 실패부분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집어치워! 현상유지를 하려면 아예 문을 닫아 버려!"라고 함으로써 이미 최고권력자의 눈밖에

난 송당목장은 민간불하의 운명을 걷게 되었다.

그렇게 송당목장과 귀빈사로 대변되는 이승만의 이름은 서서히 빛이 바래져갔다...

권력의 무상함이 아닐 수 없다.

 

 

 

 

밀기울 조차 먹지 못하던 제주도민들 앞에서 '우리국민도 이제는 쇠고기를 먹어야 합네다'라고 외치던 그 목소리는

오늘, '쇠고기를 값싸게 배불리 먹읍시다'라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왔다.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미국에 의존해 쇠고기를 먹을려고 계획했던 당시의

위정자나, 오늘날의 위정자나 달라진게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참고자료: 도백열전 I-사단법인 제주도지방의정연구소